어느 골짜기 메아리

Francoise Hardy

히라소리 2019. 11. 26. 19:25

Et Si Je M'en Vais Avant Toi

당신이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날거야

Francoise Hardy (1944- France)

A1. L'eclairage - Track 전곡 연주

 

Album Title: Et Si Je M'en Vais Avant Toi

Artist: Francoise Hardy
Audio LP (Jenuary 14 1972)
Number of Disc: 1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Country: France
Genres: Latin, Pop
Style: Blues Rock, Country Rock, Chanson, Pop Rock
Label: Sonopresse
Copyright: (c) 1972 Sonopresse France
Total Length: 32:52

 
 

A1. L'eclairage
A2. Pardon
A3. La Berlue
A4. Bruit de Fond
A5. Le Soir
A6. Cafard
 
B1. Ou Est-Il?
B2. Prisons
B3. Quand Mon Amour Va Prendre l'Air
B4. Ma Vie Interieure
B5. Bowm Bowm Bowm
B6. Et Si Je M'En Vais Avant Toi

F. Hardy
F. Hardy
F. Hardy
F. Hardy
F. Hardy
F. Hardy, J. Dutronc
 
F. Hardy
F. Hardy
F. Hardy
F. Hardy
F. Hardy, Mike Jones, T. Bowm
F. Hardy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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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oise Hardy (Et Si Je M'en Vais Avant Toi) (1972, Sonopresse)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팬들을 놀라게 했던 이 앨범은 곡 구성의 측면에서 가장 ‘록적인’ 감각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12곡의 수록곡들 중 한 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프랑소와즈의 자작곡이며, 앨범을 통해 우리는 그녀가 당시의 음악 스타일(일렉트릭 사운드와 비트의 강조)들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앨범의 녹음을 위해 그녀는 런던에서 영국인 뮤지션들과 함께 작업을 진행했고, 10곡이 런던의 사운드 테크닉스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오케스트레이션 편곡은 영국 포크 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토니 콕스(Tony Cox)가 담당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스타일의 변화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제리 도나휴(Jerry Donahue)의 기타 사운드는 모든 곡들에서 강조가 되며, 재발매반의 타이틀로 쓰이기도 했던 ‘L'Eclairage(조명)’와 ‘Ou Est-Il(그는 어디에)’, ‘Prisons(감옥들)’ 등에서 들을 수 있는 짙은 블루스 감각의 연주와 그에 적절히 어울리는 프랑소와즈의 목소리의 조화는 아주 이색적인 느낌을 전해준다. 프랑스어로 불리는 블루스라니! 마치 에릭 클랩튼(Eric Clapton)의 ‘Double Trouble’을 듣고 있는 듯한 ‘Ou Est-Il’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앨범을 빛내는 곡들은 파리에서 녹음되어 마지막으로 수록된 두 곡이다. 그녀 특유의 매력이 잘 표현된, 맑은 키보드에 어우러지는 스트링과 브라스가 멋진 ‘Bowm Bowm Bowm(쿵쿵쿵)’과, 유럽의 음악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은 걸작 ‘Et Si Je M'en Vais Avant Toi(내가 너보다 먼저 떠나게 된다면)’가 그것이다. 역시 두 말이 필요 없는 뛰어난 앨범이다.

 

Francoise Hardy  Great Musicians

by Richie Unterberger
One of her weaker efforts, frequently characterized by a happy-go-lucky, pedestrian country-blues flavor. It's nice to know that she was keeping her ears open to outside influences. Yet we Yankees who love Francoise listen to her, at least in part, because of her oh-so-very French qualities. If you want to hear lame L.A.-style early '70s mellow rock, there are plenty of alternatives to turn to before you head for the import bins. It would be nice to lay the blame with some wrongheaded producer, but actually Hardy wrote almost all of the material herself. Yet it's not entirely dismissable. The most pop-oriented productions--"Carfard," the title track, and the gorgeous "Bowm Bowm Bowm"--are delicately tuneful and sensitively performed, even if they're incongruous with the rest of the album.

 

 

가을빛을 닮은 여인 Francoise Hardy

샹송(chanson).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이면 누구나 이 말이 영어의 'song'에 해당하는, '노래'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설사 프랑스어를 알지 못하더라도 샹송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이 단어가 내포하는, 포근함, 따스함, (옛 사랑의 추억에 실려 전해오는) 아련함과 같은 뉘앙스를 느낀다면, 이미지의 재빠른 연상 작용에 의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들은 다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이브 몽탕(Yves Montand), 아다모(Salvatore Adamo), 실비 바르탕(Sylvie Vartan), 조르주 무스타키(Georges Moustaki), 앙리코 마샤스(Enrico Macias), 그리고 제인 버킨(Jane Birkin) 등등. 여기에는 우리가 흔히 ‘팝송’을 말할 때 떠올리는 가수들의 이름과 음악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분명 다른 감성이 담겨 있다. 이미 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70년대에 완전히 확립된 대중음악의 틀은 동시대의 프랑스 음악에 그다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세계 시장에서 온갖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생성과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프랑스의 샹송은 같은 색깔의 패턴과 스타일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80년대 이후 신세대 젊은이들의 영미(英美)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비롯된, 흘러간 옛 노래들에 식상한 이들에게 환호를 받은 소위 ‘프렌치 팝(French Pop)’의 열풍이 일기 전까지는 프랑스의 대중음악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고유의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던 것이다. 자국(自國)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그네들 특유의 자긍심과 그들만의 독특한 감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제 프랑스 출신 가수들의 음악에서는 노랫말에서의 독특한 발음과 억양, 그리고 여전히 그 맥을 잇고 있는 이국적(異國的)인 느낌 등을 제외하면 여느 팝 음악과의 차이점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다른 나라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며, 우리의 신세대들이 그러하듯 '가요무대'에나 나올 법한 노래들엔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샹송이란 것은 이제 40대 이상의 아저씨 아줌마들의 가슴 한 구석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는 옛 꿈일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거대한 카리스마와 힘을 지닌 몇몇 이름들은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끊임없이 언급되고 있다. 그들의 음악은 유행에 관계없이 소비되고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적 영감(靈感)으로 작용하며 또 꾸준히 새로운 팬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지역적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아티스트들은 말 그대로 독보적인 음(音)의 세계를 펼쳐 보임으로써 꺼지지 않는 불꽃과도 같은 정열과 감동을 듣는 이들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주는 것이다. 프랑소와즈 아르디라는, 지극히 매력적인 눈빛을 지닌 이 가수가 가지는 힘은, 고색창연한 진부함으로 퇴색되어 가는 ‘샹송’에 대한 생각을 슬그머니 달리 하게 할 정도의 강한 마법이 되어 듣는 이를 향기로운 꿈속으로 인도한다.

프랑소와즈 아르디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건 10여 년 전, 한 구두 광고에 그녀의 음악이 사용되면서부터다. 흥겨운 리듬과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친근한 멜로디에 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당시까지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요정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Comment Te Dire Adieu(어떻게 네게 안녕이라 말할까)’라는 제목의 그 곡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FM 심야방송을 통해 소개된 'Rendez-Vous D'Automne(가을의 만남)'이나 'Star' 등과 같은 곡들이 음악 애호가들의 커다란 사랑을 얻게 되자, 그녀의 앨범이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고 여러 종류의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수입되는 등 뒤늦은 반응이 나타났다. 하지만 국내에 알려진 대부분의 옛 샹송 가수들의 경우가 그러하듯 그녀의 작품들 역시 단위 앨범으로서가 아닌 ‘싱글 모음’의 형식으로 소개되었을 뿐이다. 물론 50년에 가까운 그녀의 가수로서의 경력이 일일이 열거되기에는 국내의 시장 여건이 너무도 열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90년대 초부터 그녀의 모든 정규 앨범들이 CD로 재발매 되어 많은 팬들의 환영을 받은 바 있다.

동시대의 수많은 팬들이 그녀에 열광했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이 시대의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태어나기 20년쯤 전부터 ‘유행가’를 불렀던 한 가수에 빠져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다른 샹송 가수들보다 노래 실력이 월등히 뛰어나다든지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녀의 음악은 그 스타일과 분위기, 그리고 내용적인 면에서 일반적인 샹송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노래 실력으로 따지자면 그녀를 능가하는 수많은 이름들을 댈 수 있다. 'Le Premier Bonheur Du Jour(하루의 첫 행복)'나 'Je Serai La Pour Toi(널 보러 거기 갈 거야)' 등의 곡들에 실리는 짙은 가을 하늘과 같은 지극히 맑고 서정적인 느낌이나 'A Quoi Ca Sert?(그게 무슨 소용이에요)', 'Message Personnel(개인적인 이야기)' 등을 감싸는 여리고 풍성한 감성 등 그녀를 대표할만한 여러 곡들에서 전해져오는 아름다운 향기 탓일까? 긴 생머리에 그윽한 눈빛을 지닌, 딱히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이 풍겨 나오는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로부터 전해지는 모든 것들이 혼합된 채 화학반응을 일으켜 마치 사랑의 묘약과도 같이 듣는 이들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그녀의 피할 수 없는 매력은 모던 포크의 정상에 위치해 있던 밥 딜런(Bob Dylan)을 사로잡았었고, 그는 자신의 네 번째 앨범 [Another Side Of Bob Dylan](1964)의 슬리브에 수록된 시 ‘다른 종류의 노래들(Some Other Kinds Of Songs)’을 통해 파리와 결부된 그녀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은 그 카리스마는 블러(Blur)의 보컬리스트 데이먼 알반(Damon Albarn)을 자극시켰고, 결국 1995년, 30년이라는 세대의 벽을 허문 채 20대의 젊은 밴드와 50대의 가수는 듀엣 곡 'To The End'를 발표한다. 또한 펑크의 선구자 역할을 했던 기인(奇人) 이기 팝(Iggy Pop) 역시 1997년, 그녀와 함께 'I'll Be Seeing You'라는 달콤한 노래를 불러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에도 많은 뮤지션들은 자신들의 음악이 프랑소와즈 아르디의 음악에 ‘빚을 지고’ 있으며, 그녀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한 일이라고 말한다. 창밖의 빗소리에 녹아드는 향기로운 커피의 맛을 천천히 음미하며, 파란 가을 하늘빛이 묻어나는 것만 같은 상쾌한 바람이 온 몸을 휘감아올 때, 그리고 별들이 아름다운 눈물을 쏟는 한밤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그녀의 음악을 들어 보라.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할 무렵 프랑스에는 ‘예예ye-ye’의 열풍이 불고 있었다. ‘예예족’이란 1944년에서 1947년 사이에 태어난 전후(戰後)의 베이비붐 세대, 철저한 소비 지향의 세대를 일컬었던 말이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시기를 누린 이들은 그들이 문화와 유행에 가장 민감한 나이가 된 60년대 초반의 로큰롤 문화를 거침없이 받아들였다. 당시 유행을 주도하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나 폴 앵카(Paul Anka), 닐 세다카(Neil Sedaka) 등이 꼽히는데, 특히 1960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젊은 여성들이 이 대열에 동참하여 새로운 현상을 이루어낸다. 소위 '예예 소녀들(ye-ye girls)'로 불린 이들의 등장은 깜찍한 외모를 자랑하던 실비 바르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와 더불어 프랑소와즈 아르디와 프랑스 갈(France Gall) 등의 여가수들이 선두에 섰고, 영국의 페튤라 클라크(Petula Clark)나 미국의 낸시 할로웨이(Nancy Holloway) 등이 그 뒤를 잇는다. 예예족들은 전 세대들과는 확실히 다른 자신들만의 젊은 문화 양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중요한 사회 현상으로 주목되기에 이른다.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선두주자인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는 1966년, 예예 현상을 다룬 영화 '남성-여성(Masculin-Feminin)'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유행가들을 프랑스어로 번안한 곡들이었는데, 이는 틀림없는 상업적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상은 새로운 우상의 등장으로, 유행은 새로운 유행의 창조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약동과 격변의 한가운데에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서있었다.

프랑소와즈 마들렌 아르디(Francoise Madeleine Hardy)는 1944년 1월 17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파리 제4대학(소르본 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며 문학 수업을 한다. 그녀가 음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어머니로부터 대학 입학 기념으로 기타를 선물 받으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한 프랑소와즈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60년 봄, 처음으로 레코드사의 오디션에 응시를 했다. 여러 회사들과의 접촉 끝에 결국 ‘보그 레코드(Disques Vogue)’와 계약한 그녀는 1962년, 네 곡이 수록된 첫 EP를 발표한다. 여기에는 유례없는 히트를 기록한 싱글 'Tous Les Garcons Et Les Filles(모든 소년 소녀들)'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EP는 프랑스 내에서 2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는데, 언론에서는 ‘프랑소와즈 아르디는 불과 18개월 동안 에디트 피아프가 18년 간 팔아온 것보다 더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당시 신세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그들의 소비 성향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느 새 스타가 되어버린 그녀의 재능은 노래에 그치지 않았다. 그 해에 창간된 ‘안녕 친구들(Salut Les Copains)’이라는 신세대 잡지는 프랑소와즈 아르디를 캐스팅함으로써 최고의 인기를 누릴 수 있었고, 프랑소와즈 아르디의 초기 이미지 확립에 큰 공헌을 한 그 잡지의 사진작가 장 마리 페리에(Jean-Marie Perier)가 담아낸 그녀의 모습은 신비로운 요정 그 자체였다. 그녀는 60년대 최고의 사진 모델로서,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상형’으로서, 마돈나(Madonna) 이전에 프랑소와즈 아르디 이상의 영향력을 가졌던 여자는 없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시대의 아이콘으로서 역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예예족이나 트렌드 메이커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고 깜찍했고 또 섹시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섹스어필을 통한 상업성을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단순히 제작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부른 노래의 80퍼센트 이상을 스스로 썼던, 내면의 감정을 솔직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냈던 시인이었다.

1963년, 모나코에서 개최된 유러비전 송 콘테스트(Concours de l'Eurovision)에서 프랑소와즈는 'L'Amour S'en Va(떠나간 사랑)'라는 곡으로 5위 입상을 했다. 또한 프랑소와즈 사강(Francoise Sagan)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로저 바딤(Roger Vadim) 감독의 ‘스웨덴의 성(Chateau En Suede)’에 출연하여 주목을 받는다. 그녀는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보이는데, 1963년부터 1967년까지의 그 시기는 그녀가 음악적으로도 절정기에 올라 있던 때이기도 하다. 그녀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한 1963년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의미가 되는 해였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생활지(誌)인 ‘파리 마치(Paris Match)’에 당대의 여가수로서는 처음으로 표지 모델로 실리게 된 것이다. 그녀가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인물임이 증명된 셈이다. 이후 그녀는 70년대 중반까지 한 해에 한 장 이상의 수준 높은 앨범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많은 이들은 그녀가 국제적인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자신의 히트곡을 다양한 언어로 불렀다는 사실을 손에 꼽는다. 영어, 독일어와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버전의 곡들은 유럽 내에서 프랑소와즈 아르디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그녀는 자신에게 정당한 로열티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결국 프랑소와즈 아르디는 1967년, 불리한 계약 조건으로 묶여 있던 ‘보그 레코드’를 떠나 자신의 레이블인 ‘아스파라귀스(Productions Asparagus)’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프랑소와즈 아르디가 자신 노래의 주된 주제로 삼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쉽게 끝나고 마는 사랑, 잘못된 사람과의 사랑,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과 그로 인한 외로움 등, 사랑과 관련한 일상적인 내용들이 시로 표출이 된다. 또한 깊은 슬픔과 우울함, 친구, 죽음과 심지어는 자살 등에 관한 이야기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녀의 꾸준한 활동과 퇴색하지 않는 재능은 수많은 작곡가, 뮤지션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더욱 빛을 내뿜었다. 거기엔 미셸 베르제(Michel Berger), 장 미셸 자르(Jean-Michel Jarre),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피에르 바루(Pierre Barouh), 필립 부바르(Philippe Bouvard), 그녀의 배우자인 자크 뒤트롱(Jacques Dutronc),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 알랭 수숑(Alain Souchon), 그리고 세르주 갱스부르(Serge Gainsbourg) 등 프랑스 대중음악계의 여러 거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70년대 후반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초, 중기의 어쿠스틱 기타와 맑은 오케스트레이션이 이루던 따스한 분위기 대신 프렌치 팝 스타일의 보다 복잡하고 비트가 강조된 편곡이 많이 눈에 띄지만, 세월이 흘렀어도 그 매력은 변함이 없다. 깜찍한 예예 소녀였던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이 졌고,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넘쳐나던 긴 금발은 짧은 커트머리로 바뀌었지만 온화한 빛을 내뿜고 있는 두 눈은 여전히 맑고 영롱하다.

글 출처: Interstellar Overdr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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