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성삼 1집 길
1. 귀향 2. 한 여름밤의 숲 3. 어둠 속에 피는 꽃 4. 뱅뱅뱅 5. 어기야 디여 어기야 디여 6. 나그네 7. 에헤야 데헤야
8. 길손 9. 강,숲,하늘 10. 소생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1970년대 중반부터 30여년간 토속 국악가락을 포크리듬에 녹여온 노래하는 장돌뱅이 곽성삼... 그의 노래들은 일반대중들에게 여전히 낯설지만 대중가요 마니아들에겐 1980년대의 대표적 언더그라운드 포크 싱어 송 이터로 추앙을 받는 독특한 대중 음악가이다. 기억 나는 노래로는 유한그루의 한스런 목소리로 사랑을 듬뿍 받았던 국악가요 [물레]가 있다. 피트 씨거(Pete Seeger),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등으로 시작되어 과거의 음악들을 채집하고 소개하면서, 민중들의 애환과 일상의 모습을 담아내던 미국의 포크 음악은 70년대, 기타의 무한정한 전파와 더불어 국내의 젊은이들에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음악 문법에 반기를 들고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 이 음악적 갈래는 대부분 [사랑]중심의 젊은 낭만을 노래하거나 개인적인 서정을 읊던 부류와 포크 본연의 정신을 고수한 김민기, 서유석, 이정선, 정태춘, 김광석, 안치환 등으로 이어지는 계파를 형성했다. 이들 중, 젊은 초상들이 군웅할거 하던 초창기 시대에도 지극히 마이너 집단을 형성했던 곽성삼은 이성원, 김두수 등과 함께 3인방으로 불리며 포크의 진정성을 제대로 실어 나르던 가수다. 그는 이 땅의 본토박이들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생한 호흡, 한(恨)이 담긴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했으며 국악적인 모색으로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반도의 작은 세계와 그 우주를 나누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성현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던 1집의 달콤함이 너무나 괴로워, 세인들에게 그 앨범을 숨기고 다닐 정도로 진솔한 것이다. 인천 영종도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폐결핵, 아버지의 사업실패 등으로 어린 시절엔 집과 학교, 교회밖에는 몰랐던 소심한 아이였다.하지만 기타 치는 아이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곤 했던 그는 고교 진학 때 둘째 매형이 입학선물로 사준 중고 기타로 인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비록 보수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을 주입시키던 아버지 때문에 몰래 기타를 매만져야 했지만 이때부터 공부는 완전 뒷전으로 미루고 기타와 자신과의 물아 일체를 경험했다. 게다가 친구 덕택에 아르페지오 주법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후에는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le), 닐 영(Neil Young), 씨씨알(CCR), 등의 판을 모으며 매일 매일 기존의 음악을 기타로 표현해 내는 세계에 안주했다. 덕분에 졸업하면서 대학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성적이 좋지 않았고 간혹 노래 다방의 DJ를 하기도 했지만 직장보다는 오직 기타만으로 성취감과 소외감을 달랬다. 그러던 1977년 어느 날, 그는 명동 카톨릭회관의 여학생관에서 촛불을 켜고 합창하는 노래동아리의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이들의 아름다운 화음과 가락은 그의 정신을 완전히 뺐었다. 그리고 공연 도중, 사회자가 청중들을 유도하기 위해 [노래하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하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무대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모임은 평론가 이백천이 주도했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란 이름의 음악 서클 이였다. 이들은 트로트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방했으며 영가나 토속적인 민속분위기의 세상을 꿈꾸던 젊은 집단 이였다. 초창기는 김민기, 김태곤, 정태춘 등 이후 국내 음악계에서 한가락 뽑던 쟁쟁했던 멤버들로 이루어졌으며 성원의 대부분은 그리 곱지 않은 노랫말로 예외 없이 독재정권의 요주의 리스트에 올랐다. 팀에 합류한 곽성삼은 구자형, 한돌, 유한그루, 명혜원, 안혜경 등과 함께 팀을 이끌었으며 전문적인 지식이 없던 터라, 악보대신 녹음을 발췌해 가며 곡을 만들었다. 유한그루의 히트곡 [물레]를 비롯해 [나그네],[귀향]등은 이 당시에 만들어 놓은 것들이었다. 그가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며 탄생시킨 이들의 첫 작품은 1979년 그룹의 이름을 그대로 내세운 [참새를 태운 잠수함]이였다. 유한그루, 김정은, 혜현, 엄기명 등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 그는 성현이란 이름으로 [나그네][만남을 그리며][어루만져 주시는 이][얼라리야 강강수월래] 등을 불렀다. 곽성삼 자신의 솔로 앨범도 같은 해 말에 나왔다. 이 시기에 꿈속에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난 그는 앨범에서 이성에 대해 타오르는 열망을 곡으로 표현한 [이 내 몸 사랑 받아주오], [작은 소망], [사랑의 늪] 등과 같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애가들을 쏟아내었으며 [곱디 곱네][꿈 머슴애], [아기 달래기],금강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돌려주소]에서는 투박함을 배제한 절제된 음성과 새록새록 귀에 박히는 곡들로 그 감흥을 전달한다. [I want you]를 부르던 밥 딜런(Bob Dylan)이 그랬을까..? 이전까지 이후로도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이 유연함은 메인스트림이 외면한 최대의 실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첫사랑에 대한 꿈같은 열정으로 탄생시킨 데뷔앨범을, 정작 본인은 포크의 정신에 위배된 졸작으로 치부하고 좀 더 민중적인 시각을 견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곽성삼은 2년 뒤 나온 2집 [길]을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 시킨 실질적인 데뷔작으로 명명한다. 한 대학생이 버린 그림을 재킷으로 사용한 이 앨범에는 삶의 근원적인 성찰이 담긴 노랫말이 인상적이며 성가곡의 거룩함에서 영향을 받아, 목소리는 다소 엄숙하며 세파의 질곡을 이겨내는 억새풀 같은 감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앨범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단지 쏟아 오르는 태양을 그렸을 뿐인 재킷과 삶의 모습을 핍진적으로 그려낸 가사는 방송 금지라는 당연한(?) 수순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그에게 활동의 장(場)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지친 어깨를 이끌고 희망의 집으로 돌아가는 [귀향]등의 수록곡들이 입 소문을 타고 번져 나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음반은 소문으로만 판매되며 재판을 찍을 수 있었고 희귀품이 되어 비싼 값을 내고도 찾는 이들이 급증했다. 오히려 이런 암울한 시대의 불가항력적인 탄압은 민중의식과 운동권이 표방하는 계급투쟁의식과는 별개로 그를 포크 가수의 한 전형으로 만들었고 김민기식 포크 영웅으로 새롭게 창조했던 것이다. 그 후 길 떠나는 나그네처럼, 길손처럼, 그렇게 훌쩍 우리 곁에서 사라진 그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다시 우리에게 타전을 보내왔다. 솔로 앨범 발표 후 유한그루, 서유석, 강은철, 손경희, 풀님 별님 등에게 곡을 써주며 생활을 이어갔던 그는 곧 보일러공, 수위, 주유원, 외판원 등의 직업을 가지며 비로소 민초들과 하나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20년 동안 오로지 자기만의 음악을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리하여 그는 밑바닥 생활로 일군 자연스럽고 평범한 소시민들의 삶과 사회생활을 체득하여 그 힘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줄기차게 음악에 대한 쉼 없는 전진으로 화성학을 체화 하는데 성공했으며 질그릇처럼 투박한 삶의 정서가 배여 있는 맛깔 나는 가락이 응축되어 나왔다. 그야말로 권토중래한 이 작품의 우러나오는 생명력 있는 가사와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뚝심 있는 목소리는 여전히 일품이다. 삶의 기로에 선 외로운 서민들의 가슴에 표표히 파고들어 진중함을 이끌어 내며 대중들의 애환을 위로해준 그는 현재 음악적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다음 앨범의 구상도 이미 끝마쳤다. 그것은 전작들을 재녹음해 좀더 완벽한 사운드로 재현해 내는 것이며 새 앨범은 70인조의 웅장한 사운드로 클래식, 록과 어우러져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품격 있는 우리가락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사이를 떠도는 불쌍한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한 한 판 씻김굿을 하는 것이며 종래엔 형식을 무시한 자유로운 음악 스타일로 삶과 인간의 모습을 다루려 한다. 거기에 미완의 프로젝트 [한단고기]까지. 그의 음악은 이제 시작이라고 밖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