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려온 "정태춘 박은옥 20년 골든 앨범"이 2002년 3월 발매되었다. 1978년, 정태춘의 첫 앨범 '시인의 마을'부터 1998년,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정동진/건너간다'까지 총 11개의 음반에 수록된 100 여 곡 중, 33곡을 엄선하여 하나의 앨범(2CD)에 담았다. 지난 겨울, 음반 발매사를 옮기면서 신보와 몇 년 후 30주년 기념 전집 발매 계획을 검토하던 중, 지난 20여 년간을 정리하고 향후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기존 3개 사에서 발매된 11장의 앨범 중, 정태춘 박은옥이 직접 제작 배포하던 6종의 앨범을 모두 절판시키고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 받은 곡 33곡'만을 선정, 발매하게 된 것이다.
이번 음반이 다른 가수들의 베스트 음반과 그 의미가 다른 것은, 가수 중심의 히트곡 앨범이 아닌 작가 중심의 "작품 연대기 앨범"이라는 점이다. "정태춘 박은옥 20년 골든 앨범"은 정태춘, 박은옥이라는 두 가수가 그들의 음악적 성과를 집대성한 20년 앨범 결산 작업이기도 하지만, 작품자 정태춘의 작품세계의 추이와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변화상을 한 눈에 되돌아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국내 가요계 초유의 일이며, 이 점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일인 것이다.
앨범 작업을 마치고, 정태춘은 그 기념 공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번 작업은 제게 각별한 것이었습니다. 착잡하지만, 그간 11종의 앨범에 묻어 있었던 그 앨범마다의 끈적끈적한 제 개인적 소회를 모두 털어내고, 그 20년을 하나의 앨범 개념으로 요약하고 새로 출발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간의 제 노래들을 스스로 평가해야 했구요. 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첫 번째로, 그간의 노래들이 모두 나의 주관적인 독백이었구나. 사춘기 일기 같은 노래로부터 투쟁적인 노래들까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그들의 노래로 받아들였을까 ?
두 번째로, 나의 노래는 "주변자의 노래"였구나. 우리 사회의 중심 혹은, 주류, 대세에 대해 끊임 없이 불만스러워하고, 투덜대고 그리고, 비판하고, 공격하고, 풍자하고. . . 메인 스트림이 결코 정당하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와, 그것의 주변자들로 전락되고 소외됐던 수많은 대중들. 이것이 내 노래 존재의 배경이었구나.
세 번째로는, "가장 우리적인 노래"에 관한 것인데, 여기 남한 사회에 있어야 할 가장 보편적이거나 전형적인 노래는, 그 가사와 음률에 있어서 이 땅의 모국어적인 미학을 가장 잘 드러내야 하고, 메시지에서는 여기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가장 솔직하게 투영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그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것이어야 할진대, 나의 노래들은 너무 부족했구나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큰 회한 없이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이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중년의 가수로서 예술적 성취에 관한 큰 욕심이나 한 사람의 사회 활동가로서 사회 변혁에 대한 급진적인 조급증들도 털어내고 이제까지 보다 더 담담하게, 차분하게 새로운 노래들을 해 나가야지요. 주변자들이 노래를 계속 불러야지요."
정태춘 박은옥 - 20년 골든앨범(1978-1998) 01. 시인의 마을 02. 회상 03. 떠나가는 배 04. 윙 윙 윙 05. 촛불 06. 사망부가 07. 서울의 달 08. 애고, 도솔천아 09. 봉숭아 10. 북한강에서 11. 바람 12. 탁발승의 새벽 노래 13. 우리는 14. 장서방네 노을 15. 하늘 위에 눈으로 16. 들 가운데서 17. 서해에서 18. 사랑하는 이에게 3 “오늘 내가 디딘 자국은 드디어 뒷사람의 길이 되리라”. 선구자적인 발상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았던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이 말을 그대로 옮겨온다면, 오늘날 이 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대중 음악의 마지막 투사 정태춘(1954년)일 것이다. 그는 < 실업극복국민운동 >부터 시작해 <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 북한동포 기금마련 < 한가족 열린 음악회 >, < 고 문익환 목사 헌정 음반 >, 서구의 문화침탈에 대항한 <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 >까지 자신의 참여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사회개혁의 기치를 빼어들었다.
그는 비록 김민기와 같이 시대적 요청의 화합물이 되거나 서태지와 같은 권능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간 파워맨은 아니었지만, 고군분투하여 따낸 사전검열제도폐지와 끔찍한 진실의 현장을 포착한 < 아! 대한민국 >, < 92년 장마, 종로에서 > 등으로 그 동안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했던 소위 운동권의 저항가요들을 뛰어넘었다. 그것은 대학이란 포장지로 감싼 운동권 가요의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는 민중의 노래였으며 오랜 시간 다져진 글래디에이터의 자신에 찬 고백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들어서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이 농부의 아들은, 고등학교 때는 현악반에 다니면서 음악대학에 대한 꿈을 키운다. 하지만 청년시절의 방황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도 선생님과의 이별은 그를 어두운 사춘기적 자화상 속에서 살게 했고, 재수와 함께 시작된 여러 번의 가출은 이 우울한 시인을 젊은 날의 불안한 군상들 속으로 인도했다. 그는 마음을 잡지 못했고 결국 군대를 가야했다. 이미 학창시절에 곡을 쓸 줄 알았던 그는 이 시절에 ‘서해에서’, ‘시인의 마을’, ‘사랑하고 싶소’와 같은 곡들을 만들었으며, 차근차근 모아두었던 곡들로 제대 후 평론가 최경식의 주선에 의해 서라벌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1978년 말에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은 엄청난 대중적인 파고를 일으키며 정태춘을 스타덤으로 인도했다. 비록 많은 가사들이 검열에 의해 수정되긴 했지만 그는 ‘시인의 마을’로 1979년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으며 ‘촛불로’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부문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신인가수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78년 만난 인생의 동반자 박은옥과 1980년 결혼식을 올린다. 불교적 색채를 드러낸 2집, 국악과 양악 편곡의 멋진 대비를 보여주는 3집의 실패로 경제적인 압박을 받은 그는 부인 박은옥과 같이 하기 시작한 1984년의 앨범에서 ‘떠나가는 배’로 또 다시 스매시 히트를 터트린다.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스테디 리퀘스트곡을 남긴 이 음반은 포크적 색채를 버리고 스트링 세션 위주의 편곡으로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간 앨범이었다. 음악을 포기할 마음까지 먹었던 그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았으며 1985년 1월부터 시작된 < 정태춘.박은옥의 얘기 노래마당 >라는 공연을 벌였다. 자신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이 공연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인 문제들을 얘기할 수 있는 솔직한 태도가 좋았던 그는 TV를 배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북한강에서’, ‘붕숭아’와 같은 곡으로 계속 대중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주화 투쟁과 6.29 선언 등으로 변화한 국내의 분위기를 실감한 그는 검열을 의식해 발표하지 못했던 곡들을 모아 < 무진 새노래 >라는 타이틀로 내놓으며, 이 때부터 달라진 사회적인 시각과 국악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엉켜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1988년부터는 <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라는 공연을 펼쳐 외세의 시각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있는 현 세대를 교정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청계피복노조 지지공연을 시작으로 전교조 지지공연, 전노협 지지공연 등에 참석하거나 주도적으로 행사를 만들어 대중집회의 단골주자로 부상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만들어진 < 아, 대한민국 >이 1990년 발효된 새 음비법을 따른 공륜에 의해 거부당하자, 음반을 불법 복제 테이프로 만들어 발표하며 전면적인 투쟁을 선포했으며1991년 1월 29일 < 음반 및 비디오에 관한 법률 개악 저지를 위한 대책위원회 >의 위원장을 맡아 반대 성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전검열제도 폐지와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계속해서 < 92 장마, 종로에서 >를 테이프로 제작해 배포했으며 이 앨범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피땀 어린 노력이 배어 있는 사전 심의 조항 폐지 운동은 1995년 11월 7일 국회를 통과하며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 힘없던 시인의 승리는 이렇게 기나긴 길을 돌아서 찾아왔다. 그의 고생을 우리는 피상적으로밖에는 알 수 없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감동과 환희의 순간이었다. 1998년 정태춘은 늘 함께 해온 부인 박은옥과 함께 20주년 기념 음반을 발표했다. 함춘호, 조동익 등의 일급 세션이 참여한 이 앨범에서는 초창기 서정미의 단아해진 멜로디들을 들을 수 있으며 한 층 더 깊이가 새겨진 선동성을 읽을 수 있다. 포크 음악인들 위주의 중견 가수들과 함께 위성방송에 음악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콘텐츠 회사 S.O.K를 설립한 그는 평생 넘어야 할 산처럼 버티고 있는 국악에 대중적인 접근을 꿈꾸며 지금도 대중 집회를 빠짐없이 순회하고 있는 이 시대 민중의 거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