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슴 아프게>는 1967년
<박상호>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가수 <남진>과 <남정임>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또
<전양자>, <이빈화>, <주증녀>등의 여배우들이 조연으로 나와 영화의 재미를 더해준다. 영화의 내용은 당시,
널리 유행하던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일본과 한국에 거주하는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루었다. 영화속에서도 <남진>은 가수로 나와
많은 노래를 들려준다.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으나, 남진의 노래는 크게 히트하였고, 70년대 한국가수가 일본에서 재취입하기도 하였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 노래인 <가슴아프게>는 1960년대 나온 인기대중가요 가운데 하나다.
4분의 4박자 트로트로 부르기가 쉽고 멜로디연결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맑으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의 미남가수 남진이 젊은 시절 취입한 노래로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노래는 남진이 가요계데뷔
후 1년 만에 부른 가요다.
1966년 가수가 되기 위해 가출하다시피 집을 나와버린 남진은 <울려고 내가 왔나>를
데뷔 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대중들의 눈을 끌진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가슴아프게>를 불러 단번에 뜨는 가수가 됐다. 연정의 대중적인 노랫말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바람을 타고 남녀간 만남이 자유스런 분위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무렵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했던 까닭이다.
50대 이상 장·노년층들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의 원제목은 <가슴 아프게>가 아니었다.
노래제목이 바뀌어 탄생한 이 노래의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66년 남진이 서울
경복고를 막 졸업한 후 어느 날이었다. 남진이 국내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당시 한국일보 기자(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전 한국일보 부장/월간 편집국장)를
우연한 기회에 만난 것이다. 그 땐 레코드취입 전으로 짧은 머리에 자주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를 보면 꽤 재미있다.
“자네 가출했지?”
“네!
부모님들이 가수 되는 걸 하도 반대하셔서 나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 속 썩히지 말고 공부나 하지
그래!……”
남진은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없었다. 끝까지 가수가 돼야한다며 막무가내였다.
“최희준 씨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게 꿈이다”면서 오히려 “좀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정 씨는 자신의 말이 도무지 먹혀들지 않자 겁을 주기로 했다.
“자네 실력으론
가수 되긴 틀렸으니 일찌감치 그만둬!”
“그래도 더 노력할 테니 도와 주십시오.”
결국 정 씨는 남진의 집념과 성의에 손을 들고
말았다. 남진이 가수가 될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써준 것이다.
음반을 낼 수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연결시켜 주고 작사가, 작곡가와도 선이
닿게 했다.
경남 하동 출신의 작사가 정두수(본명 정두채/시인 정공채 선생의 동생)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이미자 노래 등을 작곡,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박춘석 씨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진을 위한 음반취입 준비작업이 하나 둘 이뤄지고 있을 때
정 씨는 레코드사로 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진이 부를 노래작곡이 끝났으니 한번 들어봐 달라는 전화였다.
정 씨는 서울 충현동에 있는 작곡가 박 씨 집으로 갔다.
작사가 정두수,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 그리고 노래를 부를 남진이 와
있었다.
2층 작곡실에서 박춘석 씨가 남진이 부를 곡을 피아노로 쳐주며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노래제목은 <낙도 가는 연락선>.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그 시절 대중들 취향에 맞는
노랫말은 좋다고 느꼈으나 노래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같은 의견에 작사가
정 씨 역시 동감한다며 제목을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노래제목들 대부분이 명사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으나 과감하게
부사나 형용사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몇 가지 가제목들을 달아봤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가슴 아프게>였다. ‘아프게’란 부사로 노래제목을 단 것이다.
부사로 끝나는 제목이 드물었던 터라 노래는 나오자마자 눈길을 모았다.
방송전파를 타면서 남진 노래는 크게 히트했고 1967년 <가슴 아프게>란 제목의 영화까지 나왔다.
남진은 그 영화에서 남정임과 함께 주연을 맡아 가수 겸 영화배우로 날개를 달았다.
미남형 가수와 미모의 여배우 연기가 화제를 모아 노래는 영화와 더불어 상종가를
쳤다.
본명이 김남진(金湳鎭)인 남진은 목포시내 부잣집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국내가요계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가요계 간판스타였다.
‘오빠’소리를 처음 들은 가수, 가수 팬클럽이 처음 만들어진 가수로 기록될 만큼
인기정상을 달렸다.
그러던 중 남진은 젊은이들의 월남참전바람을 타고 1969년 증파되는 베트남 참전군의 일원으로 파병,
1971년 귀국 때까지 전장에서 뛰었다.
제대 후 부산출신 가수 나훈아와 경쟁을 벌이며 귀국 첫해 <눈물로 끝난 사랑> <마음 약해서>에
이어 1972년 히트곡 <님과 함께>로 가요계를 평정했다.
<그대여 변치 마오> <꽃분이> <마음이 고와야지> <미워도 다시 한번> 등
숱한 레퍼터리로 승승가도를 달려온 그는 요즘도 가끔씩 무대에 서며 열심히 뛰고
있다.
가슴아프게/남진
당신과 나사이에 저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것을
해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것을
아득히 바다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아프게 가슴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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