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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가 남긴 명곡 12곡

히라소리 2019. 11. 12.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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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자가 남긴 명곡 12곡

 

                      1. 화류춘몽                            

                      2. 목단강 편지                        

                      3. 어머님 전상서                     

                      4. 화륜선아 가거라                  

5. 요동 칠백 리

                   

                      6. 애수의 압록강                     

                      7. 뗏목에 실은 정                    

                       8. 꽃바람 분홍 비                     

                                     9. 결사대의 아내  (친일가요)                     

                                      10.마지막 필적    (친일가요)                       

                      

                     11.살림단장                          

                       12.아리랑 삼천 리                    

 

              이화자는 우리나라 , 신민요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가수다.            

             이화자는 경기도 부평 니나노 (값싼 술집)집에서 접대부로 있었는데...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의 형인  김용환(작곡가)               

             노래 잘 부르는 처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부평으로 갔다.                

 

               그 곳에 주근깨가 많은 이화자가, 젓가락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과연 노래 잘 부르는 여자임을 알고 가수로 데뷔 시켰다.    

 

이화자 노래는 날이 갈 수록 인기가 좋아                       

돈도 제법 많이 모았으나 방탕의 길을 걸었다.                

 집도 살 만큼 부자였는데, 여관신세에 만족하였고 .         .

  나중에 아편을 맞는 등, 문란한 생활을 하였다.                

 

남자없이 밤을 보낼 수 없었던 이화자는.                        

 젊은 나이에,추운 겨울밤을 헤매다가 삶을 마감 하는         

불우한 여인 이었다.                                                 

 이화자의 노래중 가장 심금을 울리는                              

 " 화류춘몽"등을 들으면서 밤의 정취를 느껴 보시기 바란다 .

 

권번(기생)출신 가수 이화자의 일생     

                 

 이화자(李花子, 1916~1950)는 지난호의 장일타홍(張一朶紅)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천권번(仁川 券番)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다. 권번에 대해서는 전호에서 대강 신태범(愼兌範) 박사의 글을 인용, 설명했지만 이번에는 1955년에 발간된 고일(高逸) 선생의 『인천석금(仁川昔今)』 중에 인천권번에 대해 기술한 내용과 함께 이 두 사람에 대한 언급을 옮겨 본다. 연예(演藝) 자체를 천시하던 사회 분위기여서 일반인이 유행가수를 지망한다는 것은 꽤나 드문 일로서, 이화자나 장일타홍처럼 노래와 춤의 기본을 익힌 권번 기생들이 가수를 지망했을 것이다. 

“인천 기생은 인천기생조합에서 어린 시절부터 기생 공부를 했다. 조합은 권번(券番)이라 했다. 권번에서는 노래와 춤을 가르쳤는데, 평양의 기생학교만은 못 했어도 선생을 앉히고 가르쳤다. 지금 용동권번 자리에는 미용사기술전수학교가 들어섰다. 기생조합 시대에 걸출한 포주 최성인

 

이 조합장이 되었었고, 최후의 권번 대표는 낙원 주인이었다. 인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유행 수로 진출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이화자(李花子)는 인천 기생으로 「어머님 전 상서」를 레코드에 취입했으며, 같은 레코드 가수 장일타홍(張一朶紅)도 용동권번 출신이었다.”

권번 기생에 대한 설명과 함께 거기 출신 가수 이화자가 전국적으로 상당히 유명했음을 시사하는 정도다. 전호의 장일타홍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별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아주 단편적인 기사 몇 가지가 그 시절 잡지와 신문 등에 전해질 뿐이다. 1938년 8월 1일에 발간된 잡지 『삼천리』에 이서구(李瑞求)가 쓴 가수들의 활동이나 근황 같은 것을 소개하는 만필류(漫筆類)의 글 「유행가수 금석(今昔) 회상」을 옮겨 본다. 

“<포리돌회사>는 또 같은 가수를 오래 지니고 있는 점에 단연 그 특색이 있다. 왕수복(王壽福), 선우일선(鮮于一扇), 김용환(金龍煥), 윤건영(尹鍵榮), 이 네 가수는 포리돌지 정창설초에 당시의 문예부장으로 조선 레코-드계의 가장 공로가 큰 이원배 씨가 단심성력을 기우려 모은 진용이었다. 이래 4년 동안 그 같은 가수를 가지고 당당 대회사의 가수진을 대항해 가는 것을 본다면 이원배 씨의 선배다운 점을 인증치 않을 수 없다. 요사이 신인으로 이화자(李花子), 조영심(趙影心) 두 미희가 전속진에 가당되어 있다. 역시 신민요(新民謠)의 선우일선은 각 사를 통해서 제 일인자가 될 것이요, 김용환 군의 독특한 노래는 아직도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본다. 이화자의 신민요는 선우일선에 비하야 선이 굵다. 그 대신 깊은 맛이 있다. 이 점에 이화자의 새로 개척할 길이 있지나 않을까 한다.”

데뷔 3년 정도가 되었을 신인 이화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호평을 읽을 수 있다. 이 밖에 다른 기록으로는 1940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춘계 독자 위안회 오케- 호화 진용, 당야(當夜) 출연 예술가 소개’ 기사가 있다. 이화자는 동아일보사 주최 독자 위안 무대에 섰던 모양으로, 오늘날에도 널리 이름이 회자하는 쟁쟁한 가수들과 나란히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이 소개되어 있다. 당시 일류 가수로서 인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 명단을 보면, 서봉희(徐鳳姬), 홍청자(洪淸子), 손목인(孫牧人), 이화자(李花子), 장세정(張世貞), 조영숙(趙英淑), 이난영(李蘭影), 김정구(金貞九), 이준희(李俊嬉), 이인권(李寅權), 박향림(朴響林), 「아리랑 보이즈」, CMC뺀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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