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골짜기 메아리

Edith Piaf 'L'essentiel'

히라소리 2019. 9. 26. 18:40

 





 

 

 

 

 

 

 

 

Edith Piaf 'L'essentiel'

 

 

 

01. La Vie En Rose
02. Hymne A L'Amour
03. Exodus
04. Au Bal De La Chance
05. Johnny Tu N'Es Pas Un Ange
06. Cri Du Coeur
07. C'Est A Hambourg
08. Padam Padam
09. L'Accordeoniste

10. Je Sais Comment
11. L'Homme A La Moto
12. Milord
13. Mon Dieu
14. Eden blues

 

 



< 작은 체구 큰 노래 -세기의 가수 에디트 피아프 > 지금은 미국이나 영국의 음악에 밀려 유럽 가수들의 노래는 거의 전파를 타지 못하고 있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프랑스 샹송이나 이탈리아 칸소네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내의 당시 팝 팬들도 영미가수들 못지 않게 이브 몽탕, 줄리엣 그레코, 밀바 등 유럽가수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 중에서도 40년대와 50년대를 석권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는 전세계에 걸쳐 지명도를 확립한 금세기 톱 가수로 남아 있다. 시사주간지「뉴스위크」는 얼마 전 ‘20세기 100년의 스타들’ 특집을 마련하면서 에디트 피아프를 ‘불후의 프랑스 목소리’라고 칭송하고 별도의 지면을 할애했다. 그녀가 이처럼 지난 세기의 위대한 음악유산으로 기록되는 것은 단지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력(死力)을 다해서 또 혼을 토해내며 노래를 불렀다. 엄청난 파괴력이 탑재된 그 막강한 소리가 왜소한 체구의 여성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나면 더욱 경이롭다. 피아프는 참새라는 뜻의 파리 속어로 그를 스타로 키워준 카바레 주인 루이 레플레가 그의 작은 체구를 두고 붙여준 별명이다(카바레는 지금 성인오락장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애초에는 작은 뮤직 홀이었다).

 

1915년에 태어나 2차 대전 때인 1939년에 스타덤에 오르기 전까지 ‘작은 거인’ 피아프의 인생은 비참했다. 어머니는 피아프를 낳자마자 도망쳤고 아버지 역시 그녀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버렸다. 그녀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90년대의 여가수 리앙 폴리는 말한다. “피아프는 안락과 돈이란 조금도 없이 시작해 길거리에서 노래했다. 지금의 흑인 랩 가수들과 다를 게 없다.

 

진실로 사랑의 이야기와 세상의 곤궁을 노래했다는 점에서 그녀는 혁명적이었다.” 인기가 치솟으면서 프랭크 시내트라와 빙 크로스비 다음으로 돈을 많이 번 연예인이 됐지만 그랬어도 그녀의 생은 언제나 불행했다. 헤비급 복싱 챔피언 마르셀 세르당, 이브 몽탕, 자크 필스 그리고 26살 연하의 청년 테오 사라포 등 잇단 남자들과의 실연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내내 술과 진통제에 의존해 살아갔다.

 

최근 영화 「노팅 힐」에서 엘비스 코스텔로가 불러 히트한 곡 ‘그녀(She)''의 오리지널 가수 겸 작곡자이며 ‘샹송의 대부’로 추앙되는 샤를르 아즈나부르는 이렇게 술회한다. “피아프는 복서 마르셀 세르당을 사랑했지요. 그는 경기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 있었고 피아프는 베르샤이유에서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세르당은 피아프와 같이 있기 위해 일찍 떠났고 비행기는 추락하고 말았지요. 그녀는 이틀 아니면 사흘 자기 방에 꼭 박혀 있더니 삭발하고 나타나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를 불렀습니다. 방에서 그 곡의 가사를 완성하여 죽은 세르당을 위해 노래한 것입니다.”

 

피아프의 또 다른 고전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도 이브 몽탕과의 핑크빛 사연이 빚어낸 곡이다. 이처럼 상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제의 삶이 진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가 우리에게 감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피아프는 음악과 예술에 헌신한 사람이다. 결코 인기나 영예를 노리고 노래한 것은 아니었다. 죽기 전 무대에서 노래부르다 쓰러져 스탭이 무대 밖으로 끌고 나오려고 했으나 그가 피아노 레그를 붙잡고 ‘노래는 마쳐야 한다’며 고집을 부려 노래를 끝까지 마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영화「파니 핑크」에 사용되어 재조명된 후반기의 절창 ‘난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위시한 그의 무수한 노래를 듣고 있으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가공할 전율을 경험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스캔들, 비극, 알코올중독을 먼저 기억하고, 실상 그것들이 피아프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상승시킨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기적 열창의 절대 파워가 빚어내는 미학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어떤 평자가 묘사한 것처럼 신성한 광기(Divine madness)라고 할까.

 

하지만 그녀는 노래의 터뜨릴 때를 알았던 것처럼 속삭일 때를 알았고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어놓을 때를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노래에는 폭발과 절제가 절묘하게 동거한다. 간혹 전문가들은 그녀가 잘하는 노래가 아니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녀의 노래에 투영된 진실성과 불굴의 에너지만으로도 피아프가 ‘세기 최고의 여가수’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여가수를 집대성한 저서「시 밥」을 쓴 루시 오브리엔은 그녀를 ‘잔다르크와 동등한 팝 히로인’으로 표현했다.

 

1963년 48살의 길지 않은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녀가 역사에 남긴 자취는 거대하다. 그녀야말로 지금 여가수의 텃밭이 된 ‘팝 발라드’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여가수는 노래를 이렇게 해야 감동을 부른다’는 패턴을 시범한 것이다. 샹송이 프랑스를 넘어 ‘국제 음악언어’로 승격된 것도 다름 아닌 피아프의 공헌이다. 그녀는 또한 54년 미국을 방문해 피아프 열풍을 일으키면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미국판 피아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주디 갈란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명백히 그녀의 영향을 흡수하여 스타덤에 오른 인물들이다. 에디트 피아프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가수는 목숨을 걸고 노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무대에 설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다. 노래로 승부하지 않고 요란한 의상과 차림이나 섹시한 자태 등 음악외적인 측면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요즘 여가수들이 바로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인기와 명성에만 중독이 되어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이런 무대에 대한 천착이 있을 리 만무다. 그러니 그들의 노래에서 어찌 그녀와 같은 카리스마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사망한지 어느덧 35년 이상이 흘렀어도 아직도 에디트 피아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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