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 (Bees)
* 조용필도 퇴짜맞은 락 밴드의 자존심!
대중들이 기억하는 락 밴드는 몇 팀이나 될까. 온전한 의미의 락 밴드는 아니지만 1960년대 초 '코끼리 브라더스'를 시작으로 이 땅에는 모래알처럼 많은 밴드들이 명멸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대부분 락 밴드들은 그들의 음악적 성과에 대한 올바른 평가보다는 군사정권에 의해 저주받은 퇴폐의 온상으로 취급받아 왔다.
5인조 락 그룹 '비스'(Bees)는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흔적조차 찾기 힘든 수천 개 밴드 중 하나다. 미8군 밴드로 출발해 가장 먼저 외국의 락 음악을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던 음악 첨병이었지만 가요 마니아들조차도 그들의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이태원 세븐 클럽과 명동 미도파 살롱, 오비스 캐빈을 주 무대로 활동하던 이들은 당시로서는 드문 팬클럽 결성 움직임까지 불었을 만큼 청춘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인기 그룹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후반 이수만의 빅 히트곡 '파도'의 오리지널 보컬 그룹이기도 하다. 진한 샤우팅의 보컬 하모니로 아롱진 창작 데뷔 곡 '파도'는 당시로선 너무 진보적인 사운드였다. 폭넓은 대중들의 호응은 얻지 못했지만 젊은 층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그룹 '비스'는 1970년대 한국 락 그룹의 르네상스 시대를 전면에서 주도하던 제3의 핵심 밴드였다. 국민가수 조용필도 무명시절 '비스'의 멤버가 되고자 오디션을 봤지만 탈락했던 아픔을 지닌 숨겨진 사실은 놀라움을 안겨준다.
'비스'는 1967년 겨울 동두천 보살리의 기지촌 서울 클럽에서 변변한 이름도 없이 태동했다. 창단 멤버는 김민배(LG), 박영태(O), 손정택(B), 이승명(RG/V), 이부일(D)로 구성된 5인조였지만 뚜렷한 음악 리더 없이 'The Animals', 'The Monkeys', 'The Beatles' 등 외국 음악을 주로 연주했던 설익은 밴드였다.
'하마'라는 별명으로 묘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구사하던 보컬 이승명에 멤버들은 음악적 불만을 드러냈고, 이리저리 팀을 옮겨 다니자 팀이 깨져버렸다.
'The Bee Gees'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실상의 리더 손정택은 그룹명을 '비스'로 정하고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해 낼 리드 보컬을 애타게 찾아 다녔다. 4인조 락 그룹 '라이더스'에서 시원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이상만이 마음에 들었다.
1967년 결성되어 이태원 아메리칸 클럽을 주무대로 The Beatles 음악을 연주하던 4인조 대학생 그룹 '라이더스'는 용주골 미군 기지촌, 운천 플라밍고 클럽에서 활동하던 밴드였다. 손정택은 이상만이 아메리칸 클럽 주방의 친구와 송곳으로 장난을 치다 오른쪽 눈을 다쳐 활동을 중단하자 1969년 봄 리드 보컬로 영입하여 화려한 '비스'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리드 보컬 이상만은 1948년 봄 리드 보컬로 영입되어 화려한 '비스'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아주 특별했던 한국 락의 아웃사이더!
신중현의 '에드 훠'와 김홍탁의 '키보이스'라는 큰 줄기로부터 가지를 치며 양산된 그룹들은 1960년대 말부터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를 늘려갔다.
'비스'는 자생적인 제3의 그룹이었다. '라이더스'의 보컬 이상만의 합류로 탄력을 받았지만 1970년 초 드럼 이부일이 탈퇴하면서 잠시 주춤거렸다. 멤버 충원을 위해 클럽들을 순회하며 타 그룹들의 연주를 주시했다. '차밍 가이스'의 드러머 배광석과 '파이브 휭거스' 출신 세컨 기타 겸 보컬 조용필이 오디션을 받았지만 배광석만 영입되었다. 베이스 손정택은 "지금은 대스타지만 당시 조용필은 기타 실력이 모자라고 보컬이나 음악 스타일이 헤비메탈을 추구하는 우리와는 맞지 않아 떨어뜨렸다."고 회고한다.
5인조로 복귀한 '비스'는 미8군 세븐 클럽과 더불어 미도파 살롱과 오비스 캐빈 등 일반무대에 진출하며 인기 그룹 'He6'에 버금가는 젊은 층의 호응을 얻었다. '비스'는 경쾌한 댄싱곡과 'Santana'의 비트 강한 곡들을 주 레퍼토리로 연주하던 중 작곡가 정민섭과 인연을 맺으며 그의 부인 양미란의 세션을 맡았다. 고마움을 느낀 정민섭은 음반 제작을 주선했다. 음반발표소식은 꿈같았다. 곧바로 이태원 광선여관, 오복여관에서 한 달 간 합숙훈련을 하며 피나게 연습해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녹음에 들어갔다. "새롭게 바이올린 현 소리를 접목해보니 소름이 끼쳤다."고 멤버들은 당시의 흥분된 마음을 전해준다.
부산 해운대에서 촬영한 재킷 사진으로 독집은 아니었지만 2장의 음반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데뷔 음반 [초원/마지막 데이트]에는 'He6'의 히트곡 '초원'과 번안곡 'Sookie Sookie'와 이펙트 기타 연주로 시도된 연주곡 'In-A-Gadda-Da-Vida'(이나가다다비다), 'Born To Be Wild'(본 투비 와일드) 등 4곡이 수록됐다.
창작곡 ‘파도’가 수록된 두 번째 음반 [파도/후회는 없다]엔 번안곡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와 '사랑의 편지' 등 3곡이 수록되었다. 창작곡들은 키보이스류의 편안한 트로트 락 계열의 노래들이었다. 최대 히트곡은 '파도'였다. 1970년대 후반 대히트를 했지만 평이했던 이수만의 '파도'와는 달리 '비스'가 들려주었던 오리지널 곡은 후렴부의 샤우팅이 대단했던 헤비메탈 사운드였다. 멤버들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명동 YMCA 뒤 중앙다방에 팸플릿을 만들어 돌리고 DJ에게 '곡을 틀어 달라'고 적극적으로 홍보를 했다. 어느덧 '비스'는 신문과 잡지에 소개되며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1971녀부터 MBC '젊음의 리듬' 음악 프로에 단골 게스트로 출연하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보컬 이상만이 바닥을 뒹굴며 노래하는 파격적인 무대 매너가 TV를 통해 나가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모았다.
'더 뜨려면 '이상만과 비스'로 그룹명을 변경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비스'는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대학 1, 2학년 층에게 강하게 어필하며 팬 클럽 결성 움직임까지 꿈틀거렸다.
1971년 포크 듀오 '아미고스'의 멤버 중 가수 윤일로의 막내 동생 윤승칠을 세컨 기타로 합류시키며 6인조로 재편성됐다. 음악적으로 물이 오른 '비스'는 문화공보부 장관 배, 플레이보이 배, 경향신문배 전국 보칼 경연대회 등에서 윤승칠은 신인 가수상, 이부일과 박영태도 개인 연주상을 수상하는 등 정상권의 락 그룹으로 대접 받았다. 열성 외국 팬들이 일반 출연 업소인 미도파까지 매일 찾아오는 등 인기를 누리던 '비스'는 1972년 군사정권의 퇴폐풍조 일소 압박에 사분오열이 되었다.
활동환경이 흔들리자 리더 이상만은 '신시봉과 트리퍼스'에 잠시 들어가 1973년 말 부산 송도의 나이트 클럽 오픈 공연을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고, 1972년 말 센츄럴 호텔 나이트 클럽에서 나머지 멤버들은 팀을 정비해 서울과 지방의 무대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하지만 1974년 드럼 배광석이 군기피자로 끌려가면서 '하얀 비둘기' 등 여러 그룹으로 멤버가 흩어지며 1981년 해체의 길을 걸었다.
리드 보컬 이상만은 1973년 비스를 탈퇴한 후 완전히 가요계를 떠났고, 리드 기타 김현배와 베이스 손정택은 1975년 ‘연석원과 까치소리’와 ‘비둘기 그룹’에서 함께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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