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1936년 신파극
대명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제가
오빠 학비 벌기위해 기생된 홍도의 한 많은 사연
담아
(1절)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절)
구름에 쌓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거둬주는 바람이 분다
(3절)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게살자
진흙에 핀꽃에도 향기는높다네
마음 네행실만 높게가지면
즐겁게 웃을날이 찾아오리라
오빠는 전문학교 학생인데, 학비사정으로 더는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홍도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로 모로 애를 썼으나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권번에 들어가 오빠의 학비를 마련해준다. 권번이란 기생들을 고용하는 일종의 조합인데, 홍도는 오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유흥가에서 노래를 팔지만 마음은 푸른 하늘 흰 구름같이 순백하였다.
그런데 오빠친구인 심영철이라는 전문학교 학생이 홍도의 아름다운 미모에 이끌려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졸업후 홍도와 심영철은 사랑이 무르익어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심영철은 부잣 집 아들이었으므로 일본에 유학을 가지만, 오빠는 돈 없고 권세없어 구직의 길을 헤매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편, 어느날 홍도의 시어머니는 그녀가 부모없이 자랐으며 기생노릇을 하였다는 트집을 잡아 아들과 파혼시키고 부잣집 딸인 김혜영을 며느리로 삼을 것을 결심했다. 날이 갈수록 눈에 든 가시처럼 홍도를 미워하던 시어머니는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하고 있는 서가와 짜고 홍도를 아들과 파혼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이리하여 결국 홍도는 시집에서 쫓겨나
오빠에게 찾아온다. 그렇지만, 홍도는 남편인 심영철이 돌아오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풀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그러나 홍도가 그토록 마음속으로 믿고 있던 심영철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어머니의 말만 듣고 부잣집 딸 김혜영이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뜻밖의 소식을 알게 된 홍도는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하소연할 데가 없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나으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차라리 죽을바엔 자기의 사랑을 파탄시킨 부잣집 딸 혜영이를
죽이고 자신도 죽어버리자고 결심을 하게 이르른다. 이렇게 모진 마음을 먹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가서 과도로 예식을 치르고 있는 혜영을 찌른다.
그러나 그 찰나 사람들이 밀치는 바람에 그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찰에 체포 된다.
하지만, 결혼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홍도가 죄가 없다는 것,
오빠의 학비를 대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기생노릇을 했지만 마음은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안다.
홍도는 무죄로 석방되고 오빠는 마음에 없는 직업을
버린다.그리고 이들 남매는 몹쓸 세상을 원망하며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살길을 찾아 떠나려 한다. 이때, 심영철이 찾아와 홍도 오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죄를 한다. 이 때 오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의 속마음을 모르고 친구로 사귀었던 것이 잘못이고,
사랑하는 누이동생과의 결혼을 허락한 것이 애당초 잘못이었네. 기름과 물이 혼합될 수 없듯이
자네같은 유산자와 나와 같은 무산자는 친구가 될 수 없음을 너무나 늦게야 깨닫게 되었네, 잘 있게".
이말을 남기고 홍도와 오빠는 시골로
떠난다.
[동아일보]‘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
'홍도야 우지 마라’는 대중 신파극의 상징이었다.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형
‘최루(催淚)극’의 원조다.
1936년 7월 23일부터 여드레 동안 동양극장에서 초연(初演)된
연극은 대성황이었다.
첫날부터 관객은 초만원이었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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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는 영화 속의
다른 주제가들과 달리 연극주제가란 점이 독특하다. 노래를 낳은 연극작품은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1936년 7월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이었던 동양극장에서 전속극단 ‘청춘좌’에 의해 첫 공연됐다.
공연 첫날부터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일제강점기
한국연극사에서 가장 많은 관객동원기록을 남겼다. 제목이 한 때 주제가 곡목인 ‘홍도야 울지 마라’로 알려졌던 이 연극은 작가 임선규가 동양극장에
입사하면서 시험용으로 쓴 대본에서 비롯됐다. 큰 기대를 걸지 않고 그냥 한번 써본 대본이 졸지에 ‘성공한 작품’으로 연극사에 올라있다.
임선규가 처음 대본을 썼을 땐
극장관계자들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너무 눈물을 짜게 하는 내용이란 이유에서였다. 그러잖아도 나라 잃은 설움으로 백성들 마음이 아픈데
연극내용까지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면 장사가 될 수 없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특히 연출자 박진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던 중 한 쪽으로 밀렸던 대본이 어느 날 기회를 갖게
됐다. 원래 제목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던 이 연극대본이 동양극장 홍순언 사장 손에 들어갔다. 마침 무대에 올릴 작품이 없어 고민하는
차에 ‘원고를 손질, 공연하자’는 홍 사장 고집을 직원들이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다. 사장입장에선 극장을 놀리는 것보다 다소 맘에 들진 않지만
대본을 약간 손봐 무대를 돌리면 배우들 월급이라도 벌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장집념에 못 이겨 총지배인 최독견이 제목을 바꿔 무대에 올린
게 1930년대 성행했던 신파극의 대명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다. 작품은 상상외로 흥행에 성공했다. 한 여성의 애달픈 사연을 담아 가슴을
찡하게 했던 데다 주제가 역시 내용에 맞게 흘렀던 까닭이다.
홍도란 기생이 오빠(철수)의 학비를 벌기위해 기생이 된다.
홍도는 오빠친구(광호)를 만나 집안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다. 그러나 시어머니 멸시와 시누이의 음모로 시집에서 쫓겨나고 남편으로부터도 버림받는다.
절망에 빠진 홍도는 우발적으로 칼을 휘두르고 순사(경찰관)가 된 오빠에게 수갑이 채여 잡혀가는 내용이다.
여주인공 차홍녀와 남자주인공 황철의 돋보인 연기는 순식간에
장안에 퍼져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로 극장출입문 유리가 박살나기도 했고 연극삯으로 보리쌀자루를 내미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현금 외는 일절 사절’이라고 써 붙여놔도 막무가내였다. 극장주변도로까지 찬 사람들로 전차가 못 다닐 정도였다.
관객들 중 기생들은 연극을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며
극장에서 훌쩍거렸다. 연극이 있는 날이면 장안의 술집들엔 사람들로 꽉 찼다. 기생에서 건달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홍도가 불쌍하고 배신한
광호를 죽일 놈’이라며 연거푸 술잔을 든 것이다.
또 하나 에피소드는 남녀주인공 얘기다. 극장 앞엔 인기절정의
두 사람을 만나러 온 팬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황철은 얼굴 한번 보게 해달라며 몰려드는 여성들 성화에 연극이 없는 날엔 숨어서 지냈다. 황철은
청양군수 아들로 이 연극에서 열연, 1930~40년대를 통틀어 조선 최고배우가 돼 이름을 날렸다. 차홍녀를 사랑했으나 결실을 못 맺고 유부녀였던
배우 문정복과 살게 된다. 차홍녀는 1915년 경기도 여천출신으로 17세 때 연극을 시작했다. 마음씨가 착해 ‘천사’로 불렸던 그녀의
이름자(홍)를 따 연극에서 홍도 배역을 맡았다. 작가 임선규가 집필 때 맘이 워낙 고운 그를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쉽게도 그는
25살에 세상을 떠났다.
연극의
인기는 주제가 <홍도야 울지 마라>로 이어졌다. 극중 노래가 나오면 갑자기 서러움에 북받친 관객들이 따라 불러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날만 새면 남자는 징병, 여자는 위안부로 끌려가는 시대라 나라 잃은 약소국의 서러움이 노래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노래는 단번에 인기 1순위로
떠올랐다. 요릿집, 술집은 물론 서민들도 한잔 들었다 하면 젓가락장단으로 불러댔다. 거나하게 취한 하루살이 인생들 입에서 입으로 매일 서울의
밤을 적셨다.
가게 문에 가사를
크게 붙여놨으나 글을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하게 읽어주는 사람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마음을 울린 이 노래는 어려운 시절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국민들을 위한, 말 그대로 국민가요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노래를 부른 가수 김영춘(88)은 올해 2월 22일 밤 10시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김해출신인 그는 1932년 김해농고를 졸업하고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 전속가수로 데뷔, <항구의
처녀설> <바다의 풍운아> <항구의 사랑> 등 대표곡들을 남겼다. 유족은 부인 박옥순 씨, 딸 옥자(일본 거주)씨,
아들 무술(두산인프라코어 대리점 운영)·한준(음악인)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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