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설움)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로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전라남도 강진읍 남성리 211-1번지 영랑 김윤식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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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부른, 가수 김성옥.
메조소프라노의 맑고 정감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김성옥은 58년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해 이후 62년, 홍콩으로 출국하기까지만 한국에서 활동했다.
1958년, 당시 김성옥씨는 KBS 전속가수이었고, 손석우 선생은 KBS 악단 지휘자였다.
당시 국민들의 귀가 온통 라디오에 쏠렸던 59년도에 방송된 드라마 ‘모란이 피기까지
는’은 영랑 시를 모티브로 당시 방송작가 이경재씨가 각본을 쓴 드라마로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았다.
가수 김성옥 씨는 KBS 전속가수 시험 당시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성불사의 밤’을 불
렀을 정도로 대중가요 가수이기 보다는 성악을 꿈꿨던 음악생도였다. 실제로, 오디션
당시 수백 명의 지원자 중 유일하게 노래를 끝까지 부른 주목받았던 응시생이었다.
62년 여름, 김성옥 씨는 무대를 해외로 옮긴다. 이 6개월 일정의 홍콩 공연을 시작으로
이후 마닐라, 방콕,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 사이공등등 동남아 순회공연을 통해 가는
곳마다 인기를 얻으면서 결국 활동무대 자체가 해외무대로 바뀌게 된다.
특히 그를 눈여겨 본 영국 에이전시에 의해 픽업되어 영국을 비롯해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핀란드, 파키스탄 등을 다니며 세계 각지의 공연 길에 올랐다. 특히 스페인에는
1년간 머무르며 공연을 했는데, 이 때 스페인 TV ‘Spain on Television Española’의
인기 쇼프로그램인 ‘Noche De Sábado(토요일의 밤)’에 출연하는등 눈부신 활동을 한,
말하자면 ‘한류의 원조’이자 ‘한류 스타 1세대’였던 셈이다.
결국 김성옥(金聖玉, 예명 Kathy Kim)은 이후 1988년, 미국 플로리다(Florida)로 이주
하였다. 스페인에서의 이름은 카따리나, 그리고 미국명으로는 케티. 현재 이름은 ‘케티
쿡(Kathy Cook)'이다.
-이상, 박성서(대중음악평론가)님의 글에서 간추림.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성옥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에 봄을
찬란한 슬픔에 봄을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모란이 피기 까지는
나는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에 봄을
찬란한 슬픔에 봄을
"모란이 피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