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에 눈을 떠라 박 현:작사/이봉조:작곡눈물을 감추어라.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생각하면 무엇하나 지나간 추억
그래도 애타게 그리는 마음
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간다
돌아서면 가로막는 낮은 목소리
바람이여 안개를 걷어가다오
아---아---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은 감추어라
세계 10대 느와르에 여지 없이 빠지지 않는 말타의 매나 카사블랑카와 견줄만한
한국영화의 느와르풍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김수용감독의 67년작 안개를 꼽을 것이다.
다만 그곳에는 <갱>이 빠졌을 뿐,
아니다, 어쩌면 갱보다 더한 속물적 인간들이
안개의 포말 속에서 스물거리며 기생하고 있는
익명의 섬을 포진하고 있으니,
느와르의 조건은 다 갖춘 셈이다.팜므파탈도 있다.
정체불명의 국민학교 음악선생님,
윤정희는 당시로서는 탈출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몸을 파는
파격적인 정조관념의 여성으로 등장한다.음악은 또 어떻고,
시종 이봉조의 섹소폰 연주와 함께 암울한 인간의 내면세계가 엎치락 뒤치락 버무러진다.
서울에서 돈많은 과부를 만나 금의환양한 주인공을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고향의 텁텁한 안개와 갯벌에서 올라오는 숨막힐 듯한 습기들이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전쟁을 피해 비굴하게 숨죽이며 살아가던
청춘의 지난했던 한때를 회상하게 된다.
강렬한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로 대비되는 섬의 풍광들은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관객에게 서늘한 주술을 걸어온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의 69번째 영화에서
가능한 모든 카메라의 기술과 편집을 동원해서
문학이 영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가에 관한 거나한 실험을 시도한다.
숨막힐 듯 신성일의 미세한 속눈썹의 떨림까지도 표착해내던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듯이 광활한 갯벌 위로
피빛처럼 번져나가는 낙조의 흐름을 역시 익스트림 롱숏으로 거침없이 잡아낸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낙훈씨의 세무서 안에서의 거들먹거리는
연기는 정액처럼 텁텁한 안개와 함께
갈 곳을 잃은 윤정희를 더욱 더 벼랑끝으로 내어몬다.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한 신성일은 윤정희를 통해서
그토록 이 섬을 탈출하기 위해 발버둥치던 자신의 한 때 모습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 대목이 바로 김승옥의 원작이 말하려고 한 <무진기행>의 주된 테마가 아니었던가?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섬니아>가 김수용의 <안개>를 보았는지 몰라도,
상당부분 모방했다 싶을 만큼의 유사성 쇼트가 발견된다.
백야의 알래스카에 도착한 알 파치노가 불면증으로 잠을 못이루고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은 이미 우리의 신성일이 완벽하게 연기해 내었다.
신성일이 불면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에서
김수용은 고다르의 점프 컷을 빌려와서 시간의 무상함과 초급함을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군부대에서 공수해온 연막탄으로 만들어 낸 스모그는
흑백의 안개를 창출해내는데 더없이 훌륭했으며
그 따가운 연기 속에서 가끔씩 미간을 찌푸리는
신성일과 윤정희의 대사들은 황홀하기 까지 하다.
(김수용 감독은 이 영화를 찍고 폐병환자처럼 기침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화 <안개>에서 <신성일>과 <윤정희>의 러브신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장면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장면으로 평가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전 선생님과 앞으로 딱 1주일간만 눈부신 연애를 하겠어요"
하지만 신성일은 그 1주일의 시간도 견디디 못하고
윤정희를 두고 무진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그녀의 절박함을 너무도 잘 알기게,
신성일은 그녀를 그 무서운 고독 속에 방치해둠으로써
자신의 비굴했던 삶에 동참자를 하나 더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아, 영화 역사상 이토록 비열하고, 저급한 주인공이 존재했던가?
그래서 <무진기행>은 아직도 대학 교양 과목의
<동서문학의 이해>에서 빠지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외국어 대의 불어과 앙드레 파브로 교수는
<안개>를 보고나서의 충격을 이렇게 묘사했다.
"실로 놀라운 영화다.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나<태양은 외로워>에서의 무드와
<부베의 연인>의 감동,
또는 알랭 레네가 <지난해 마리앤버드>에서 창조했던
미지의 시간을 김수용의 안개는 느끼게 만든다"고 극찬에 극찬을 마지 않았다.
평론가 이효인이 안개가 한국영화의 근대화를 70년 앞당겼다고 한 것처럼,
안개는 너무 일찍 만들어진 우리 영화 역사의 불운한 걸작이다.
안개를 통해 밝혀지는 한국인의 심성 속에 드리운 악마성의 예언은
실로 섬뜩함 그 자체이다.
살아가면 갈수록 내 자신이 신성일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철저한 이기주의에 물들어 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명의 이기가 급박해질수록 마치 연어의 회귀본능과도 같이
우리가 고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혼탁해진 심성의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해답이 바로
<안개> 같은 클래식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리라.
아시아 영화제에서 이 영화의 심사를 맡은 호세 키리노 위원장은
김수용을 잉그마르 베르히만에 비견하기도 했다.
정말이다.
40년이 흐른 지금에 봐도 너무나 세련된 음악과,
롤랑 바르트가 울고 갈 탐미적 촬영기법으로 무장한
이 놀라운 수작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제작자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가
당시 흔치 않게미국에서 영화 공부를 한 정통파 라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참, 이 영화 이후 원작자 김승옥은 <감자>를 연출했고
제작자 황혜미는 <첫경험>으로 여류감독으로 데뷔했다.
김승옥은 철저히 실패했고,황혜미는 기본 이상의 연출력을 인정받았지만
그들의 첫 데뷔작이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윤정희는 두 곡의 노래를 립 싱크로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데
<목포의 눈물>과 정훈희의 <안개>가 그것이다.
노래 장면에서 윤정희의 음악 실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안개>의 예술성을 이어받은
오늘 날의 영화 후배들이 김수용을 능가하는
더 탁월한 정통 느와르 한 편 제대로 창출해 내지 못하는 것은
분명 21세기 한국영화의 비극임에는 분명하다.
색소폰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이봉조는 외국에서 연주곡이 히트했는데
왜 한국은 창작 연주곡이 없냐며 방속국에 곡을 들고 찾아옵니다.
안개라는 색스폰 솔로곡을 듣고 PD들은 모두 좋다는 반응이었는데
그 중에서 박진현 MBC 음악부장이 가사가 있으면 더욱 히트할 것 같다
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이에 이봉조는 박진현 부장이 가사를 써주면 취입하겠다고 동의함과 동시에
열 일곱 살의 부산출신 신인 가수 정훈희를
발탁하여 안개를 부르게 합니다.
근대적 도시의 모더니즘을 반영하면서 도회의 비애를 노래하는 내용의 안개는
더욱이 정훈희가 70년 42개국이 참여하여
최고의 팝그룹 아바도 빈손으로 돌아간
도쿄 야마하 가요제에서 입상하며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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